※ 창작 야담 안내 이 이야기는 조선 시대의 생활 모습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든 창작 야담입니다.
흉년이 든 조선의 작은 고을, 백성을 살릴 구휼미 서른일곱 말이 사라졌습니다. 장부를 베끼던 한석우는 도둑으로 몰리고, 붙잡히는 순간 누이 정월을 사람들 앞에서 매정하게 버립니다. 그러나 그 한마디에는 누이를 살리고 진실을 밝히려는 오라비의 마지막 선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너는 내 누이가 아니다. 다시는 나를 찾지 마라.”
이야기 순서
- 1부 · 누이를 버린 오라비
- 2부 · 장부에서 사라진 쌀
- 3부 · 누이가 품은 두 장부
- 4부 · 밤길의 수상한 쌀수레
- 5부 · 마을 사람들 앞의 열 되
- 6부 · 빼앗긴 어머니의 됫박
- 7부 · 거짓 장부가 무너지다
- 8부 · 관아 마당에 선 남매
- 9부 · 현감의 판결
- 10부 · 다시 열린 구휼 창고
1부 · 누이를 버린 오라비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인 사내가 누이의 치맛단을 움켜쥐었습니다.

“누이야, 장부를 품고 먼저 가거라.” 사내의 이름은 한석우였습니다. 백성에게 나눠 줄 쌀 서른일곱 말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붙잡힌 참이었지요.

석우는 손바닥만 한 종이 두 묶음을 누이 정월의 품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모두 듣도록 소리쳤습니다. “오늘부터 너는 내 누이가 아니다. 다시는 나를 찾지 마라.”

정월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습니다. 오라비는 왜 사람들 앞에서 누이를 버렸다고 한 것일까요? 때는 큰물과 때아닌 추위가 함께 닥친 어느 가을이었습니다.

해원현의 논에는 빈 이삭만 남았습니다. 누렇게 마른 볏짚이 찬바람에 흔들렸지요.

날이 밝기도 전부터 관아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습니다. 그날은 관아 창고를 여는 날이었습니다. 굶주린 백성에게 구휼미를 나눠 주는 날이었지요. 구휼미는 목숨을 잇게 해 주는 쌀이었습니다.

그 시각, 스물다섯 살 정월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줄 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정월은 어머니가 남긴 놋쇠 됫박으로 쌀을 한 되씩 쟀습니다. 정월은 쌀을 솥에 붓고 물을 넉넉히 부었습니다. 이내 장작불 위에서 죽이 보글보글 끓었습니다.

“곰례 할머니, 오늘은 할머니부터 드세요.”

곰례가 손을 저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먹어야 일을 하지. 나는 나중에 먹으마.” “젊은 사람은 한 끼쯤 늦어도 견뎌요. 할머니는 약 드실 때가 지났잖아요.”

정월은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 곰례에게 내밀었습니다. 자기 몫은 늘 묽은 죽뿐이었지만, 정월은 내색하지 않았지요.

그날 아침, 죽을 나누던 정월이 문득 손을 멈췄습니다. 관아에서 쌀 한 말을 받아 오면, 나오는 죽그릇 수가 늘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일곱 그릇이나 여덟 그릇씩 모자랐습니다. 물을 더 부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월은 어머니의 놋쇠 됫박을 뒤집어 살폈습니다. 됫박은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한 말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자꾸 모자라지?”

바로 그때, 오라비 석우가 장작을 안고 들어왔습니다. 서른두 살 석우는 관아 창고에서 장부를 베꼈습니다. 품삯을 받으면 약과 소금부터 사 왔지요.

정월은 오라비의 빈 밥그릇을 먼저 살폈습니다. “오라버니, 오늘도 점심을 굶으셨지요?”

석우가 시선을 피했습니다. “아니다. 관아에서 먹었다.” “제 눈은 못 속이세요. 배가 고프면 왼손으로 배를 누르시잖아요.”

석우는 들킨 아이처럼 웃었습니다. “그럼 죽 한 그릇만 줄 수 있겠느냐?” 정월은 자기 몫까지 넉넉히 담아 주었습니다.

석우가 숟가락을 들려는 순간, 정월이 놋쇠 됫박을 내밀었습니다. “오라버니, 관아에서 정말 쌀 한 말을 준 것이 맞아요?”

“장부에는 분명히 한 말이라고 적혀 있다.” 정월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장부 말고 진짜 쌀을 묻는 거예요. 같은 솥에 끓이는데 자꾸 죽이 모자라요.”

석우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췄습니다. 그는 놋쇠 됫박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석우가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 내가 알아보겠다.” “왜 저는 말하면 안 돼요?”

“관아의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하다.” 정월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늘 그러셨지요. 위험한 일은 오라버니가 맡고, 저는 집에만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너를 지키려는 것이다.” 정월은 석우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저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석우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남매가 어렸을 때, 큰비로 냇물이 무섭게 불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석우는 어린 정월을 등에 업고 거센 물을 건넜습니다. “내가 먼저 발을 디딜 테니, 너는 내 발자국만 밟아라.”

어린 정월이 석우의 목을 꼭 안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라버니가 물에 빠지면요?”

“그때는 돌아서지 말고 어른들을 불러라. 뒤에 남은 사람이 우리가 온 길을 기억해야 하니까.”

그날부터 석우는 위험한 곳에 먼저 발을 내디뎠습니다. 하지만 이제 정월은 그 발자국만 따라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석우는 홀로 관아 창고로 돌아갔습니다.
2부 · 장부에서 사라진 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 배급 장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모든 집이 쌀 한 말씩 받은 것으로 적혀 있었지요.

석우는 장부의 이름을 하나씩 짚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다 지난봄에 세상을 떠난 박 노인의 이름에서 손이 멈췄습니다. 박 노인도 최근 쌀을 받아 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다른 고을로 떠난 사람들의 이름도 보였습니다. 석우는 수상한 이름과 날짜를 작은 종이에 적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배급한 집도 따로 세었습니다. 열 집이 지날 때마다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지요.

바로 그때, 창고 문이 열렸습니다. 창고의 배급과 장부를 책임지는 윤태문 호장이 들어왔습니다. “밤이 깊었는데도 참 부지런하군.”

석우는 작은 종이를 얼른 소매에 감췄습니다. “박 노인은 지난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도 쌀을 받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윤 호장은 장부를 슬쩍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아들이 대신 받아 갔겠지.” “그 아들도 지난해에 이 고을을 떠났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흐려져도 장부에는 실수가 없는 법이네.” 석우가 조용히 맞섰습니다. “하지만 그 장부도 사람이 쓰는 것입니다.”

윤 호장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습니다. “자네는 장부를 베끼라고 데려온 사람이야. 장부를 따지라고 데려온 사람이 아니네.”

윤 호장은 석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나갔습니다.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경고는 서늘했지요.

석우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석우는 종이를 다시 꺼냈습니다. 그리고 작은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렸습니다.

그 동그라미가 서른일곱 개까지 늘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며칠 뒤 아침, 다시 배급이 시작되었습니다.

관아 마당에는 커다란 말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한 말은 작은 됫박으로 열 되였지요. 정월도 다리가 불편한 곰례를 대신해 쌀을 받으러 왔습니다.

윤 호장이 창고 문지기 봉구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잘 보도록 넘치게 담아라.”

봉구가 쌀을 퍼 담자 말통 위에 작은 쌀산이 생겼습니다. 겉보기에는 넉넉한 한 말이었지요. 하지만 정월이 자루를 들어 보니 이상하리만큼 가벼웠습니다.

“봉구 아저씨, 이것이 정말 한 말입니까?” 봉구가 코웃음을 쳤습니다. “쌀이 넘치는 것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제 놋쇠 됫박으로 다시 재어 보겠습니다.” 정월이 자루를 풀려는 순간, 윤 호장이 다가왔습니다.

“관아의 말통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정월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믿고 말고의 일이 아닙니다. 이 쌀로 죽을 끓이면 그릇 수가 자꾸 달라집니다.”

“물을 붓는 양이 달랐겠지.” “늘 같은 솥과 같은 됫박을 썼습니다.”

윤 호장은 눈을 차갑게 뜨며 말했습니다. “배가 고프면 의심이 생기는 법이다. 이제 돌아가거라.” 정월은 더 따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말통 옆을 지나며 밑바닥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긁었습니다. 일부러 반달 모양의 흠집을 남겼지요. 그 순간, 굳은 송진 같은 것이 손톱 밑에 묻었습니다.

정월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손가락을 치마에 닦았습니다. 그날 저녁, 석우는 창고에 남은 쌀을 다시 셌습니다.

장부와 달리 창고 바닥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었습니다. 석우가 무겁게 말했습니다. “윤 호장님, 서른일곱 말이 모자랍니다.”

윤 호장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계산을 다시 해 보게.” “이미 세 번이나 다시 셌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훔친 모양이군.”

석우는 장부를 가리켰습니다. “쌀을 받았다는 집부터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윤 호장은 새 장부 한 권을 밀어 놓았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여기에 적힌 대로 옮겨 쓰게.” 새 장부에도 죽거나 떠난 사람들이 쌀을 받았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석우가 붓을 들지 않자 윤 호장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런데 산 너머 마을에 쌀 두 섬을 내준 사람이 누구였더라?”

석우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며칠 전, 산 너머 마을에 열병이 돌았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밤중에 창고까지 찾아왔지요.

하지만 윤 호장은 쌀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석우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허락 없이 창고를 열어 쌀 두 섬을 내주었습니다.

한 섬은 열 말이었습니다. 두 섬은 스무 말이나 되는 큰 양이었지요.
3부 · 누이가 품은 두 장부

석우는 쌀이 간 곳을 장부에 적었습니다. 그래도 허락 없이 창고를 연 것은 잘못이었지요. 석우가 낮게 말했습니다. “그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윤 호장이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자네 혼자 책임질 수 있을까?”

“자네 누이도 그 쌀로 죽을 끓였다지. 남매가 함께 쌀을 빼돌렸다고 하면 어찌 되겠나?” 석우는 두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정월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모르게 두게. 내가 준 장부만 그대로 옮겨 쓰면 돼.” 석우는 윤 호장이 내민 장부를 밀어냈습니다.

그날 밤, 석우는 자신이 확인한 사실만 따로 적었습니다. 정월도 읽을 수 있도록 쉬운 글을 썼지요.

하나는 사람들의 이름과 동그라미를 적은 종이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수레가 창고를 나간 날짜를 적은 종이였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단서도 있었습니다. 석우는 두 묶음을 장부 표지 안에 깊이 숨겼습니다. 관아를 나설 때, 석우는 두 묶음을 품 깊숙이 옮겨 넣었습니다.

밤이 깊어서야 석우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정월은 등잔불 아래서 관아의 찢어진 곡식 자루를 꿰매고 있었습니다.

정월은 푸른 삼베실로 두 번 짧게 꿰매고, 마지막 한 번은 길게 꿰맸습니다. 석우가 물었습니다. “왜 늘 같은 모양으로 꿰매느냐?”

“제가 고친 자루를 알아보려고요. 그래야 나중에 품삯을 떼이지 않지요.” 석우는 푸른 실밥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정월아. 만약 내가 먼저 먼 길을 떠나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정월은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도 따라가야지요.”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 정월이 오라비를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그럼 더 빨리 따라갈 겁니다.”

석우는 따라 웃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남매는 하지 못한 말을 품고 등을 돌렸습니다.

다음 날 새벽, 거친 발소리가 남매의 잠을 깨웠습니다. 관아 군졸들이 집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윤 호장이 장부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지요.

“산마을에 쌀 두 섬을 내준 사람이 자네였지. 그런데 창고에서 서른일곱 말이 더 사라졌네.”

석우가 또렷하게 대답했습니다. “두 섬은 제가 내주었고 장부에도 남겼습니다. 하지만 서른일곱 말은 제가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창고 장부를 베낀 사람도, 그날 창고 열쇠를 다룬 사람도 자네야.” 윤 호장이 혀를 찼습니다. “장부를 다룬 사람이 이제 와서 모른다고 하는군. 도둑이라면 누구나 할 말이지.”

군졸들이 석우의 두 팔을 포승줄로 묶었습니다.

정월이 놀라 달려들었습니다. “오라버니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석우는 정월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길가로 나온 사람들이 석우를 보며 수군거렸습니다.

“창고에서 일하던 사람이 쌀을 훔쳤다더라.” “그 누이도 죽을 퍼준다면서 쌀을 빼돌린 것 아니야?”

사람들의 말이 정월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일행은 관아 뜰에 닿았습니다.

그때 석우가 갑자기 비틀거렸습니다. 정월은 오라비를 붙잡으려고 다가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석우가 정월의 치맛단을 꽉 움켜쥐었습니다.

“누이야, 장부를 품고 먼저 가거라.” 석우의 손에서 얇은 종이 두 묶음이 정월의 품으로 들어왔습니다. 다음 순간, 석우는 정월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습니다.

“이 여자가 나를 관아에 고발했습니다.” 정월은 놀라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석우는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오늘부터 너는 내 누이가 아니다. 다시는 나를 찾지 마라.” 윤 호장은 남매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습니다.

석우는 정월이 자기편이 아닌 것처럼 꾸민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정월이 장부를 받았다는 의심을 피할 수 있었지요.

정월은 오라비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그 뜻을 안다고 해서 가슴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다시는 오라버니를 찾지 않겠습니다.”

정월은 등을 돌렸습니다. 몇 걸음도 못 가 눈물이 흘렀지요. 그 순간, 정월은 어린 시절 오라비가 했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앞서 가던 사람이 물에 빠지면 돌아서지 말고 어른들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뒤에 남은 사람은 그들이 걸어온 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했지요.
4부 · 밤길의 수상한 쌀수레

정월은 집에 돌아오자 문부터 걸어 잠갔습니다. 품속에서 종이 두 묶음을 꺼냈습니다.

누가 들이닥칠까 두려웠습니다. 정월은 한 묶음을 왼쪽 치맛단에 숨겨 꿰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묶음을 펼쳤습니다. 사람 이름을 적은 장부였습니다.

장부에는 쌀을 받은 집과 날짜가 적혀 있었습니다. 죽거나 떠난 사람은 따로 표시돼 있었습니다.

실제로 쌀을 받은 열 집마다 동그라미가 하나 있었습니다. 동그라미는 모두 서른일곱 개였습니다. 장부 끝에는 짧은 말도 적혀 있었습니다. 열이면 하나가 남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정월은 그 말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왼쪽 단까지 뜯으려던 그때였습니다. 문밖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정월은 장부를 오른쪽 치맛단에 넣어 꿰맸습니다. 종이를 단단히 숨긴 뒤 문을 열었습니다.

문 앞에는 윤 호장이 서 있었습니다. 윤 호장이 비웃으며 물었습니다. “오라비에게 버림받으니 어떠냐?”

정월은 속마음을 감추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제 그 사람과 남입니다.”

윤 호장은 방 안을 천천히 살폈습니다. “그자가 네게 무엇을 주지는 않았느냐?” “저를 밀친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윤 호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도둑의 가족이 캐고 다니면 공범이 되는 법이다.” 윤 호장은 고을을 떠나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정월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윤 호장이 사라지자 종이가 바스락거렸습니다. 정월은 떠나는 대신 진실을 찾기로 했습니다.

정월은 사람 이름을 적은 장부를 다시 보았습니다. 여백에는 창고 문지기 박봉구의 이름이 자주 나왔습니다.

봉구는 장터 도박판에서 큰 빚을 졌습니다. 그의 수레가 밤마다 창고를 드나든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정월은 봉구를 먼저 의심했습니다. 그날 밤 관아 창고 근처에 몸을 숨겼습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뒷문이 열렸습니다. 봉구가 쌀자루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나왔습니다.

정월은 멀찍이 떨어져 수레를 따라갔습니다. 수레는 황 객주의 창고 앞에서 멈췄습니다.

일꾼들이 관아 표식이 찍힌 자루를 안으로 옮겼습니다. 정월은 벽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창고 안에는 같은 자루가 수북했습니다. 푸른 삼베실로 꿰맨 자루도 보였습니다.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꿰맨 자국이었습니다. 정월이 직접 고쳐 준 자루가 틀림없었습니다.

정월은 드디어 쌀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새 현감 이도헌을 찾아갔습니다. 정월이 말했습니다. “봉구가 관아 쌀자루를 황 객주의 창고로 옮겼습니다.”

현감이 차분히 물었습니다. “자루 속에 쌀이 든 것도 보았느냐?”

“관아 표식과 제가 꿰맨 자루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빈 자루일 수도 있지 않으냐?” 그때 윤 호장이 끼어들었습니다. “저 여인은 도둑 한석우의 누이입니다.”

윤 호장은 정월이 죄를 남에게 씌우려 한다고 몰아붙였습니다. 현감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돌려보냈습니다.

정월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다시 봉구의 수레를 뒤따랐습니다.

비가 그친 뒤라 길에는 진흙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수레바퀴 자국은 조금도 깊지 않았습니다. 쌀자루 수십 개가 실렸다면 자국이 깊어야 했습니다. 정월은 수레가 가볍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일꾼들이 자루를 내리자 모두 납작하게 접혀 있었습니다. 봉구가 옮긴 것은 빈 자루였습니다.

정월의 첫 짐작은 틀렸습니다. 그렇다고 봉구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월은 수레 앞을 막고 물었습니다. “빈 관아 자루를 몰래 팔았지요?”

봉구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무슨 소리냐? 당장 비켜라.”

정월은 바퀴 자국을 가리켰습니다. “쌀이 들었다면 진흙에 더 깊이 빠졌을 겁니다.” “도박빚을 갚으려고 빈 자루를 팔았습니까?”

봉구는 한참 버티다가 고개를 떨궜습니다. “그래. 빈 자루를 팔았다. 쌀은 건드리지 않았다.” 정월이 다시 물었습니다. “입막음 돈도 받았습니까?”

봉구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내가 말하면 네 오라비가 살아서 나올 것 같으냐?” “진짜 도둑을 두면 백성의 쌀은 계속 사라집니다.”

봉구는 주위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배급이 끝나면 다른 수레가 들어왔다.”
5부 · 마을 사람들 앞의 열 되

“윤 호장은 쌀겨를 치우는 수레라고 했지. 그런데 쌀겨가 너무 많이 나갔다.” 봉구는 이상한 일도 털어놓았습니다. 현감이 보는 날에는 평소와 다른 말통을 썼다고 했습니다.

정월이 증언을 부탁하자 봉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빈 자루를 팔고 돈까지 받은 일이 두려웠습니다.

“내가 입을 열면 네 오라비 옆방에 갇힐 사람은 나다.” 봉구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습니다. 정월은 얕게 찍힌 수레바퀴 자국을 바라봤습니다.

쌀은 밤중에 자루째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없어진 것일까요?

정월은 석우를 만나러 옥으로 갔습니다. 옥졸은 처음에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정월은 곰례가 모아 준 엽전을 건넸습니다. 그제야 잠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석우는 차가운 벽에 기대 앉아 있었습니다. 정월을 보자 걱정이 스쳤지만 곧 숨겼습니다.

석우가 차갑게 말했습니다. “왜 왔느냐? 우리는 남이라고 했다.” 정월이 답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닌 것은 알아요.”

석우가 짧게 잘라 말했습니다. “진심이다.” “그렇다면 왜 제 치맛단에 장부를 넣었습니까?”

석우는 옥졸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장부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정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봉구의 수레에는 빈 자루만 있었습니다.”

“배급 다음 날에는 쌀겨를 치운다는 다른 수레가 나갔고요.” 석우의 눈동자가 흔들렸습니다. “정월아, 이제 그만두어라.”

정월이 똑바로 물었습니다. “오라버니가 구휼미 서른일곱 말을 훔쳤습니까?”

석우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정월은 다시 한번 대답해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훔쳤다면 네가 이 고을을 떠날 것이냐?”

“아니요. 제 눈으로 끝까지 확인하겠습니다.” 석우는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너는 어릴 때부터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정월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라버니도 늘 제 뜻은 묻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석우는 정월의 치맛단을 바라봤습니다.

석우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치맛단은 한쪽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월은 그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옥졸이 오자 석우는 일부러 큰소리를 냈습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정월은 집으로 돌아와 왼쪽 치맛단을 뜯었습니다. 그 안에는 수레 기록이 들어 있었습니다.

수레 기록에는 쌀겨를 내보낸 날짜와 양이 적혀 있었습니다. 언제나 배급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한 말, 두 말, 세 말씩 나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동그라미가 있는 날과 거의 같았습니다.

정월은 두 기록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열이면 하나가 남는다는 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다음 배급 날, 정월은 어머니의 놋쇠 됫박을 들고 곰례를 찾아갔습니다.

정월이 부탁했습니다. “할머니, 받은 쌀을 집에서 다시 재어 보고 싶습니다.”

곰례가 걱정했습니다. “관아에서 가만있지 않을 게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아니라 열 사람이 필요합니다.”

곰례가 물었습니다. “오라비를 살리려고 그러는 것이냐?” 정월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백성에게 돌아갈 쌀이 자꾸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쌀이 어디로 갔는지 꼭 찾아야 합니다.” 곰례는 정월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늙은 몸도 힘을 보태마.”

두 사람은 열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배급을 받은 뒤 정월의 집에 모여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윤 호장이 두려워 망설였습니다. 다음 쌀을 못 받을까 걱정했습니다.

정월은 억지로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받은 쌀이 한 말인지 꼭 재어 보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열 사람이 뜻을 모았습니다. 정월은 관아의 나무 말통부터 살펴봤습니다.

평소 쓰던 말통 밑에는 반달 모양 흠집이 있었습니다. 정월이 손톱으로 내 둔 표시였습니다. 그날도 바로 그 말통을 쓰고 있었습니다. 열 사람은 쌀 한 말씩을 받아 정월의 집으로 왔습니다.

정월은 놋쇠 됫박으로 쌀을 다시 쟀습니다. 첫 자루에는 아홉 되뿐이었습니다.

둘째 자루와 셋째 자루도 같았습니다. 열 자루 모두 한 되씩 모자랐습니다. 곰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쌀을 흘린 것이 아니었구나.”

정월은 돌멩이 열 개를 바닥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알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6부 · 빼앗긴 어머니의 됫박

“열 집에서 한 되씩 덜 받았습니다. 모두 열 되이고, 열 되는 한 말입니다.” “이 일이 서른일곱 번 되풀이됐습니다. 그래서 사라진 쌀은 서른일곱 말입니다.”

정월은 그제야 장부 속 동그라미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쌀은 한꺼번에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집의 몫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지요. 정월은 사람 이름 장부를 마을 어른들과 확인했습니다. 장부에는 거짓 이름이 섞여 있었습니다.

박 노인은 봄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고을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최근 쌀을 받았다고 적혀 있었지요.

이미 세상을 떠나거나 이사한 다른 사람들도 쌀을 받은 것처럼 꾸며져 있었습니다.

수레 기록에도 말이 안 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산마을 다리가 떠내려간 다음 날의 일이었습니다.

관아에서는 그날 산마을에 쌀 열 말을 보냈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빈손으로도 냇물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그 기록은 석우가 실제로 쌀 두 섬을 내준 날과 달랐습니다. 무거운 쌀수레가 산을 넘었다는 것은 거짓이었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그 날짜가 거짓임을 확인했습니다. 산마을 사람도 쌀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정월의 손에는 이어지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모자란 쌀과 거짓 이름, 거짓 수레 기록이었습니다.

정월은 증인들과 함께 관아로 갔습니다. 현감 앞에 놋쇠 됫박과 두 기록을 내려놓았습니다.

정월이 먼저 말했습니다. “여기 열 집은 관아에서 쌀 한 말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재어 보니 모두 한 되씩 부족했습니다.”

정월은 죽거나 떠난 사람의 이름도 보여 주었습니다. 갈 수 없는 날의 수레 기록도 내놓았습니다.

윤 호장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집에서 쓰는 됫박은 크기가 모두 다릅니다.” “저 됫박이 관아의 것보다 클 수도 있습니다.”

정월은 차분히 대답했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장터에서 쓰던 됫박입니다.” “장터의 다른 됫박과 대어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윤 호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사람 이름을 적은 장부는 누가 썼느냐?” 정월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습니다. “석우가 썼습니다.”

윤 호장이 기다렸다는 듯 웃었습니다. “도둑이 만든 장부로 도둑을 살리려는구나.”

윤 호장은 관아에서 쌀을 내보낸 기록을 펼쳤습니다. 그곳에는 석우의 서명이 있었습니다. “한석우는 허락 없이 창고를 열었습니다. 산마을에 쌀 두 섬을 내주었습니다.”

현감 이도헌이 정월을 바라봤습니다. “너도 이 일을 알고 있었느냐?”

정월은 그날을 또렷이 기억했습니다. 석우가 내준 쌀로 죽을 끓여 사람들과 나눴습니다. 사실을 말하면 석우의 죄가 더 커질까 두려웠습니다. 정월은 결국 진실을 숨겼습니다.

“오라버니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현감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습니다. “서명이 있는데도 아니라고 하느냐?”

정월은 한 번 더 거짓말했습니다. “누군가 서명을 베꼈을 수도 있습니다.”

윤 호장이 바로 몰아붙였습니다. “가족을 살리려 거짓말하는 사람을 어찌 믿겠습니까?” 정월의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두 섬의 진실을 숨긴 탓에 다른 증거까지 빛을 잃었습니다.

현감은 사람 이름을 적은 장부만 거두었습니다. 놋쇠 됫박과 수레 기록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돌려주었습니다.

정월은 수레 기록을 다시 왼쪽 치맛단에 숨겼습니다. 증인들의 배급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멈췄습니다.

관아를 나오자 사람들이 정월을 원망했습니다. 다음 쌀까지 끊기게 됐다며 화를 냈습니다. “오라비 하나 살리려고 우리까지 굶길 셈이오?”

정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든 것 같았습니다.

끝까지 곁에 남은 사람은 곰례뿐이었습니다. 곰례가 정월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게다.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그러나 정월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군졸들이 정월의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숨겨 둔 장부를 찾겠다며 방 안을 샅샅이 뒤졌지요.

바느질 상자는 뒤집혔고, 베틀의 실도 끊어졌습니다. 어머니가 남긴 놋쇠 됫박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7부 · 거짓 장부가 무너지다

군졸들이 물러가자 정월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왼쪽 치맛단에는 두 번째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기록마저 빼앗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정월은 치맛단을 꼭 움켜쥐었습니다.

그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석우가 옥에서 모든 죄를 자백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월은 숨이 차도록 관아로 달려갔습니다. 석우는 포승줄에 묶인 채 마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현감이 석우에게 물었습니다. “백성에게 줄 쌀 서른일곱 말을 네가 훔쳤느냐?”

석우가 고개를 숙이고 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훔쳤습니다.”

현감이 다시 물었습니다. “혼자 한 짓이냐?” 석우가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혼자 했습니다.”

현감이 곡식을 어디에 팔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석우는 강 건너 장사꾼에게 팔았다고 답했습니다.

정월은 더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오라버니는 그 쌀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석우는 일부러 매서운 눈으로 정월을 노려보았습니다. “누가 너더러 들어오라고 했느냐?”

정월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남이라는 말도 거짓이었습니다. 지금 하시는 자백도 거짓입니다.”

윤 호장은 군졸들에게 정월을 끌어내라고 명했습니다. 정월은 끌려가면서도 석우를 향해 외쳤습니다.

“저를 지킨다면서, 이번에도 혼자 결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석우는 끝내 누이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정월이 다칠까 봐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날 밤, 곰례의 도움으로 남매는 다시 만났습니다. 차가운 옥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지요.

정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왜 그런 거짓 자백을 하셨습니까?” 석우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네가 조사를 멈추지 않으니 다른 길이 없었다.”

정월이 되물었습니다. “제가 멈추면 쌀을 훔친 사람들도 멈춥니까?”

석우는 정월의 눈을 피하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너는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오라버니는 제 목숨만 붙어 있으면, 제가 잘 사는 줄 아시지요.”

석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정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습니다. “산마을 사람들에게 쌀 두 섬을 내준 것도 사실이지요?”

석우가 조용히 시인했습니다. “그렇다. 그 일은 내가 했다.” 정월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제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석우가 한숨처럼 답했습니다. “네가 알면 나와 함께 책임지려 할 테니까.”

“함께 책임지는 것이 가족 아닙니까?” 석우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너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 정월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도 제 몫은 함께 지겠습니다.”

그제야 석우는 누이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정월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말을 이었습니다.

“오라버니가 잘못한 일까지 숨기면 윤 호장의 말이 맞게 됩니다. 가족이 거짓말로 가족을 살린다는 말이요.”

석우가 걱정스레 말했습니다. “쌀 두 섬을 내준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벌을 피할 수 없다.”

정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벌은 받아야지요.” 석우가 놀란 눈으로 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정월은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은 서른일곱 말의 죄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라버니를 아무 잘못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분명히 가리려는 겁니다.” 옥 안에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석우가 낮게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정월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무엇이 미안하십니까?”

석우의 눈가가 붉어졌습니다. “너를 지킨다면서, 네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구나.” 정월은 차가운 옥문 사이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석우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습니다.

그러나 굵은 나무살이 두 사람을 가로막았습니다. 남매의 손끝은 닿을 듯하다가 끝내 닿지 못했습니다.

정월이 그 손끝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장부는 언제부터 쓰기 시작하셨습니까?”

석우가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습니다. “서른일곱 말 가운데 열일곱 말은 내가 일하기 전부터 사라져 있었다.”

정월의 눈이 커졌습니다. 석우가 일하기 전부터 곡식이 모자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른일곱 말을 모두 석우가 훔쳤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8부 · 관아 마당에 선 남매

석우가 말을 이었습니다. “현감이 지켜보는 날에는 쌀이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정월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봉구도 그날에는 다른 말통을 썼다고 했습니다.”

석우가 낮게 일렀습니다. “반달 흠집이 난 말통의 밑바닥을 다시 보아라. 송진으로 무엇인가 붙였을지도 모른다.”

정월은 중요한 단서를 얻었습니다. 이제 반달 흠집이 난 말통을 찾아야 했습니다.

옥을 나서자 곰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월아, 이제 이 고을을 떠날 생각이냐?” 정월이 분명하게 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떠나지 않을 겁니다.”

곰례가 걱정스레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렸는데도 말이냐?”

정월은 옥문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앞선 사람이 물에 빠지면, 뒤에 남은 사람이 그 길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곰례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 길을 혼자 가려는 것이냐?” 정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요. 이번에는 사람들과 함께 갈 겁니다.”

정월은 곧장 창고지기 봉구를 찾아갔습니다. 봉구는 나루터에서 빈 자루를 묶고 있었습니다.

봉구는 정월을 보자 고개부터 돌렸습니다.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정월이 봉구에게 물었습니다. “배급 때 말통을 바꾸는 것을 직접 보셨습니까?”

봉구의 손이 그대로 멈췄습니다. 잠시 뒤, 봉구가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았습니다.

“검사하는 날이면 윤 호장이 평소 말통을 치우라 했다. 소금 가마니 사이에 숨겼지.” 정월은 현감 앞에서 증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봉구는 자기 죄까지 드러난다며 망설였습니다.

“잘못한 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봉구가 한참 강물만 바라보다 물었습니다. “평소 쓰던 말통 밑에 표시가 있더냐?” 정월이 바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낸 반달 모양 흠집이 있습니다.”

봉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남아 있을 게다. 검사할 때마다 다시 숨겨야 했으니까.”

정월은 현감을 찾아가 먼저 자신의 거짓말부터 밝혔습니다. “오라버니가 허락 없이 쌀 두 섬을 내준 것은 사실입니다.”

현감이 놀라 물었습니다. “지난번에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정월은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오라버니를 살리려 거짓말했습니다. 그 탓에 제 다른 말까지 믿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정월은 치맛단에서 수레 기록을 꺼내 현감에게 건넸습니다. 현감은 기록을 증거물로 봉인했습니다.

정월은 이어서 반달 흠집이 난 말통을 찾아 달라고 청했습니다.

윤 호장은 도둑의 누이가 지어낸 말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정월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창고 문을 닫고, 말통이 있는지 직접 찾아보면 됩니다.”

현감은 정월을 바라보지 못한 채 침묵했습니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마침내 현감이 결심했습니다. “내일 상급 관청인 감영에서 관리가 온다. 그 전에 두 창고부터 봉하겠다.”

윤 호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습니다. 관아 창고와 황 객주의 창고는 곧바로 봉해졌습니다. 다음 날, 감영 관리가 창고를 살폈습니다. 소금 가마니 뒤에서 낡은 말통이 나왔습니다.

말통 밑에는 반달 흠집이 선명했습니다. 밑바닥을 하나 더 붙인 덧바닥에는 굳은 송진이 남아 있었습니다.

황 객주의 창고에서는 관아 표식이 찍힌 곡식 자루가 나왔습니다. 정월이 푸른 실로 꿰맨 자루도 있었습니다.

관아 창고에서는 윤 호장의 도장이 찍힌 원본 기록도 찾았습니다. 쌀겨 수레의 날짜와 양이 적혀 있었지요.

창고 한쪽에서는 황 객주의 거래 장부도 발견됐습니다. 쌀이 들어온 날짜와 양이 또렷이 적혀 있었습니다.

감영 관리는 말통과 자루와 장부를 모두 증거물로 봉인했습니다. 이제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확인할 차례였습니다.

그다음 날이었습니다. 관아 마당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습니다. 전날 창고를 살핀 감영 관리가 자리에 앉았지요. 그는 쌀과 장부를 직접 맞춰 보기로 했습니다.

현감 이도헌이 말했습니다. “오늘은 모든 일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겠다.”

정월이 마당 한가운데 섰습니다. 포승줄에 묶인 석우도 그 곁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남매는 잠시 눈을 마주쳤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요.
9부 · 현감의 판결

현감이 정월에게 물었습니다. “아는 것을 하나도 숨기지 말고 말하거라.”

정월은 먼저 고개를 숙였습니다. “제 오라비 석우는 허락 없이 쌀 두 섬을 산마을에 내주었습니다.” 굶는 사람을 살리려 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관아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잘못은 분명했지요.

정월은 그 일을 숨기려 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오라비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말까지 의심받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오라비에게 불리한 일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감영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다. 계속 말하거라.”

현감은 압수해 둔 놋쇠 됫박과 사람 이름 장부를 정월에게 내주었습니다.

정월은 됫박을 받아 정상 말통에 쌀을 한 되씩 부었습니다. 한 되, 두 되, 세 되. 열 번째로 붓자 말통이 꼭 맞게 찼습니다.

이번에는 밑에 반달 흠집이 난 말통이었습니다. 똑같은 됫박으로 다시 쌀을 부었지요. 그런데 아홉 번째로 부었을 때 말통이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이 술렁였습니다. 겉보기에는 똑같은 한 말짜리 말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감영 관리가 안쪽 덧바닥을 뜯어냈습니다. 그 가장자리에는 굳은 송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곰례 할머니가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세상에, 우리 쌀이 저 밑으로 사라졌구나.”

그때 윤 호장이 다급히 외쳤습니다. “말통을 만든 사람은 황 객주입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정월은 현감에게 돌려받은 사람 이름 장부를 펼쳤습니다. “이 말통으로 나눠 주면 한 집마다 한 되가 남습니다. 열 집이면 한 말입니다.”

“오라비는 열 집이 지날 때마다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렸습니다. 그 표시가 서른일곱 개였습니다.”

감영 관리는 현감이 봉인한 수레 기록과 창고에서 찾은 원본 기록을 나란히 펼쳤습니다. 두 기록에는 같은 날짜와 양이 적혀 있었습니다. 쌀은 쌀겨라는 이름으로 창고를 빠져나갔지요.

창고 문지기 봉구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가 빈 관아 자루를 황 객주에게 팔았습니다. 윤 호장에게 입막음 돈도 받았습니다.” 윤 호장이 소리쳤습니다. “도박꾼의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이오?”

봉구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제 잘못에 대한 벌은 받겠습니다. 하지만 배급 날마다 반달 흠집 말통을 내놓은 사람은 윤 호장입니다.”

“검사가 끝나면 다시 그 말통을 꺼내 쓰라고 했습니다.”

관아의 원본 기록마다 윤 호장의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황 객주의 장부에도 같은 날 들어온 쌀이 적혀 있었지요.

죽은 사람과 끊어진 다리의 기록도 거짓이었습니다. 이미 빼돌린 쌀을 백성에게 나눠 준 것처럼 꾸민 흔적이었지요. 윤 호장은 모든 일을 황 객주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정월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검사 때만 정상 말통을 썼습니까? 쌀겨 기록에는 왜 호장님의 도장이 있습니까?”

윤 호장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현감은 오래된 창고 기록도 살폈습니다. 서른일곱 말 가운데 열일곱 말은 석우가 일하기 전부터 모자랐습니다.

그러니 서른일곱 말을 모두 석우가 훔쳤다는 말은 처음부터 앞뒤가 맞지 않았지요.

감영 관리가 증거를 맞춰 보았습니다. 말통과 장부, 여러 사람의 증언이 빈틈없이 이어졌습니다.

현감이 엄한 목소리로 명했습니다. “윤 호장과 황 객주를 가두어라. 빼돌린 곡식과 재산도 모두 조사하라.”

봉구 역시 빈 자루를 팔고 돈을 받은 잘못으로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석우의 포승줄이 풀렸습니다. 하지만 석우의 잘못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감이 물었습니다. “서른일곱 말을 훔쳤다는 누명은 벗었다. 허락 없이 쌀 두 섬을 내준 일은 어찌하겠느냐?”

석우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제가 한 일입니다. 그 벌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산마을 사람들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석우가 그 쌀을 주지 않았다면, 열병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현감은 사람을 살리려 한 뜻은 헤아렸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대로 창고를 연 잘못까지 없던 일로 하지는 않았지요. 석우는 관아의 장부 일을 잃었습니다. 정해진 동안 창고와 마을의 피해를 고치는 일도 맡았습니다.

좋은 뜻이 잘못을 지워 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은 죄까지 대신 질 까닭도 없습니다.
10부 · 다시 열린 구휼 창고

현감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허물도 인정했습니다. “나는 장부가 사람의 말보다 정확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거짓 장부는 진실까지 가릴 수 있었다.”

그 뒤로는 관아 사람과 마을 대표가 함께 말통을 확인했습니다. 장부도 누구나 알아보도록 쉬운 말로 적었지요.

되찾은 쌀은 주민들에게 다시 나눠 주었습니다. 정월은 어머니의 놋쇠 됫박으로 곰례 할머니의 몫을 쟀습니다.

“할머니, 열 되가 꼭 맞습니다.” 곰례 할머니는 됫박을 쓰다듬었습니다. “네 어머니가 남긴 것이 많은 사람을 살렸구나.”

정월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서 주셨기에 밝힐 수 있었습니다.”

조사가 끝나자 감영 관리는 석우가 적은 두 기록과 놋쇠 됫박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석우와 정월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방 안은 엉망이었습니다. 베틀의 실은 끊어졌고, 장부 종이는 바닥에 흩어져 있었지요.

석우는 바느질 상자를 바로 세웠습니다. 정월은 엉킨 실을 하나씩 풀었습니다. 한참 뒤, 석우가 조심스럽게 불렀습니다. “정월아. 오늘부터 다시 오라비라 불러 다오.”

정월의 손이 멈췄습니다. “남매의 정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어요.” “다만 오라비가 저를 믿어 주지 않아 서운했습니다.”

석우가 정월을 바라보았습니다. “너를 지키고 싶었다.” “저도 끝까지 견딜 수 있어요. 그러니 이제는 저를 믿어 주세요.”

석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지킨다는 말로 네 뜻을 막았구나. 미안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엉킨 푸른 실을 함께 풀었습니다.

석우가 실을 세게 당기자 매듭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정월이 오라비의 손을 조용히 멈추게 했습니다. “서두르면 더 엉켜요. 한 가닥씩 천천히 풀어야 합니다.”

석우가 힘을 빼자 매듭이 조금씩 풀렸습니다. 석우는 낮게 말했습니다. “우리 사이도 이 실과 같았구나.”

정월은 대답 대신 실 한쪽을 오라비에게 건넸습니다. 두 사람은 끝까지 함께 풀었습니다. 정월은 바닥의 장부를 주워 석우에게 내밀었습니다.

“오라비, 이쪽을 잡아 보세요.” 석우가 장부 한쪽을 잡았습니다. 정월은 반대쪽을 놓지 않았습니다. “다음부터는 장부도 짐도 함께 듭시다.”

석우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래. 함께 들자.” 잠시 뒤 석우가 물었습니다. “내가 먼저 가면 또 따라올 것이냐?”

정월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요.” 석우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러자 정월이 환하게 웃었습니다.

“이제는 나란히 갈 겁니다.” 그제야 석우도 따라 웃었습니다. 이듬해 봄, 해원현에 다시 쌀을 나눠 주는 날이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배급 전에 말통부터 살폈습니다. 정월은 어머니의 됫박으로 쌀을 한 되씩 부었지요.

열 번째로 붓자 말통이 정확히 가득 찼습니다. 이번에는 누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사람 이름을 적은 장부와 수레 기록도 잘 보이는 곳에 놓았습니다.

정월은 글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쉬운 말과 동그라미를 함께 적었습니다.

이번 동그라미는 사라진 쌀이 아니었습니다. 열 집이 제 몫을 받았다는 표시였지요. 석우는 관아 일을 잃었지만 쉬지 않았습니다. 곡식 자루를 나르고, 낡은 창고 지붕도 고쳤습니다.

정월이 무거운 장부를 들 때면 먼저 물었습니다. “정월아, 함께 들까?”

그러면 정월은 말없이 장부 한쪽을 내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놋쇠 됫박은 이제 남매만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모두가 믿고 쓰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석우는 누이를 지키려면 혼자 앞장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정월은 가족을 사랑하면 잘못도 감춰야 한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남매는 마침내 알았습니다. 가족은 한 사람이 모든 짐을 대신 지는 사이가 아닙니다. 잘못은 바로 말하고, 억울한 일은 함께 밝혀야 하지요.

무엇보다 서로가 진실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앞선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나란히 걷는 사이. 그것이 두 사람이 되찾은 남매의 정이었습니다. 오늘의 새록야담은 여기까지입니다.

정월과 석우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으셨다면, 다음 이야기에서도 다시 뵙겠습니다. 오늘도 평안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누이를 버린 오라비의 진짜 마음
가족을 지키는 사랑은 때로 다정한 말보다 모진 선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석우와 정월은 서로를 대신해 희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거짓 장부의 진실을 밝혀냅니다. 이 조선 감동 야담은 오누이의 정뿐 아니라 기록과 증언, 공동체의 용기가 약한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된다는 뜻을 전합니다.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기
실제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인가요?
아닙니다. 조선 시대의 구휼 제도와 생활 모습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새로 구성한 창작 야담입니다.
구휼미는 무엇인가요?
구휼미는 흉년이나 재난으로 먹을거리가 부족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관아에서 나누어 주던 곡식을 뜻합니다.
이 조선 야담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관아의 장부를 베끼는 오라비 한석우와 마을 사람들을 살피는 누이 정월입니다. 남매는 사라진 구휼미 서른일곱 말의 비밀을 각자의 방법으로 추적합니다.
